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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한국의 예의문화

한국의 예의문화

by 도파공 2012.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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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예의문화(禮儀文化)

 

 

 

가. 우리나라는 예절의 나라

 

 

1)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의 출처

 

가) 우리나라는 예부터 동방예의지국(동쪽에 있는 예절의 나라)이라 했다.

나) 그 근거는 1993년 1월 29일의 교육부장관 문서(정신81120-21호)에 밝혀졌다.

“동방예의지국의 출처에 대하여: 孔斌이 쓴 ‘東夷列傳’에 ‘東方禮儀之君子國’이라는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며, 더 자세한 내용은 한국전례연구원(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4가 54, 전화 279-8242, 원장 김득중)에 문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끝”

다) 동이열전은 729년에 발해(渤海)의 고왕(高王,大祚榮)의 제 야발(野勃)이 쓴 ‘단기고사(檀奇 古史)’의 부록에 실린 것으로 BC268년에 위(魏)의 공빈(孔斌, 通鑑: 孔子의 6代孫, 曲阜孔 氏 族譜: 孔子의 8代孫)이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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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동이(東夷)에 단군(檀君)이 나라를 세우니 중국의 요(堯)와 한 때이다.

②중국의 황제(黃帝)가 동이의 자부선인(紫府仙人)에게 배우고 내황문(內皇文)을 받아 와서 염제(炎帝) 다음 임금이 되어 생활문화를 일으켰다.

③동이의 순(舜)이 요(堯)의 다음 임금이 되어 오교(五敎,五倫)를 가르쳤다.

④동이의 소련, 대련(小連,大連)형제가 효성이 극진해서 공자가 칭찬했다.

⑤동이는 크고 강했지만 교만하거나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⑥풍속이 순후(淳厚)해서 길을 양보하며(行者讓路), 밥을 미루며(食者推飯), 남녀가 섞이지 않으니(男女異處而不同席) 동쪽에 있는 예절의 군자나라(東方禮儀之君子國)라 할 것이다.

⑦공자가 칭찬해 ‘동이에서 살고 싶다’ 하면서 ‘누추하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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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동방예의지국인가?

 

가) 중국의 생활문화는 황제헌훤이 한국에 와서 자부선인에게서 배워갔고,

나) 중국의 윤리와 도덕은 한국인 순이 중국의 임금이 되어 가르쳐 주었고,

다) 소련 대련 한국인 형제가 중국에 살면서 효도를 실천해 보여 주었고,

라) 나라가 크고 군대가 강했지만 남에게 교만하거나 침범한 일이 없고,

마) 다니는 이들이 양보할 일이 있으면 먼저 발견한 사람이 먼저 양보하며.

바) 경제생활은 안 먹으면 죽는 밥도 남에게 먼저 먹으라고 미루며,

사) 남자와 여자는 따로 거처해 자리를 같이하지 않아서 예절나라가 되었다.

아) 이상의 것들은 그 전후의 중국의 경전·문헌(經典·文獻: 書傳, 論語, 孟子, 小學, 通鑑, 史記, 漢書, 說文解字)에도 있는 한국에 관한 이야기들이 모아진 것이다.

 

 

3). 이(夷)는 ‘오랑캐’가 아니다

 

가) 우리나라는 중국보다 문화선진국, 선생님의 나라, 예절의 나라인데 왜 우리나라 이야기 를 동쪽 오랑캐(夷)의 이야기(東夷列傳)라고 했나?

나) 아니다. 夷가 오랑캐라면 순임금도 오랑캐이고( 孟子:舜 東夷之人), 문왕도 오랑캐이고( 孟 子:文王 西夷之人), 周의 9대왕 夷王도 오랑캐 임금이어야 한다. 夷를 오랑캐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그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 한자가 만들어진 내력을 밝힌 BC100년의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⑴ 夷는 동쪽에 사는 사람(東方之人)이고,

⑵ 그들은 사람다운 사람(大人)의 大와 활을 잘 만들고 잘 쓰기 때문에 弓자를 합해서 夷라 고 한다. 설문 통훈정성(說文通訓定聲)에는 夷을 仁로도 쓰는데 仁(더불어 사는 어진 사람)는 옛날의 仁자와 같은 글자(仁與古文仁同字)라고 하였다.(仁는 夷仁의 古字-韓 漢大字典-)

⑶ 설문의 단옥재주(段玉裁註)에 “사방의 오랑캐는 남쪽은 蠻閩(만민, 오랑캐)인데 虫(충)을 따랐고, 북쪽은 狄(적,오랑캐)인데 犭(견·犬)을 따랐고, 동쪽은 貉(맥,담비)인데 豸(치,다리 없는 벌레)를 따랐고, 서쪽은 羌(강, 오랑캐)인데 羊(양)을 따라서 각기 성질대로인데 오 직 東夷는 大를 따랐으니 大人(대인, 군자·어진 사람·더불어 사는 사람)이다. 夷의 풍속은 仁이요, 仁者는 壽하니 東夷는 군자가 있는 죽지 않는 나라(夷俗仁 仁者壽 有君子 不死國)이다.”라 했다.

⑷ 그러므로 夷는 오랑캐가 아니라 동쪽에 사는 사람, 어진 사람, 어질다, 평평하다, 온화하 다, 안온하다, 기뻐하다, 크다, 평정하다, 무리, 떳떳하다, 쉽다, 명백하다, 편하다 등의 뜻 으로 쓰인다. 오랑캐라는 해석은 우리나라 사람만 쓰는 잘못된 자기비하(自己卑下)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⑸ 그러니까 논어(論語)에 “공자가 한국에 가서 살고 싶어 하니까(子 欲居九夷하시니), 누가 ‘더러울지도 모르는데 어찌 하시렵니까’라고 말하니(或曰 陋커니 如之何있고), ‘공자가 군 자가 사는 곳인데 어찌 더러움이 있겠는가?’(子曰 君子居之에 何陋之有리요)라고 말씀했 다”고 했다.

⑹ 우리는 문화선진국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고 긍지를 갖고 자랑스러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의한국을 재건해야 하는 것이다.

 

 

 

 

나. 한국인 정신은 ‘우리(仁)’, 더불살이이다

 

 

1) 지금도 예절나라[東方禮儀之國]인가?

 

가) 우리나라의 정규 교육과정에 예절교과목이 없다. 그것은 19세기말 개화기 이후 국난기를 겪으면서 예절교육이 생계에 필수적인 교육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생계에 직결되는 경제관련 교육에만 치중하였기 때문이다.

나) 그래서 예절을 배우려는 사람도 드물고 예절을 가르치려는 사람도 드물어 마침내 이기환 락만을 추구하는 예절이 없는 버릇없는 나라가 되었다.

다) 이제 우리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무조건적인 환락에 앞서 사람다운 건전성에 뿌리를 내 린 예의바른 본래의 참 한국인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라) 그러려면 본래의 한국인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한국인의 정신을 챙겨 한국인다움을 찾아서 가져야 한다.

 

2). 한국인 정신은 한국인에게 보편·당연한 정신이어야 한다

가) 일본인은 대화혼(大和魂), 유럽인은 기사도(騎士道), 미국인은 개척정신(開拓精神)을 국민 정신으로 내세운다. 그런데 단일민족이며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아직 한국 인 정신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

나) 선비정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선비정신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참 선 비가 너무 드물어서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 화랑정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신라의 무사도정신이다. 화랑정신 때문에 망한 고구려 와 백제의 후예들은 “그것은 아니다.” 라고 부정한다.

라) 한국인정신은 우리 한국인에게 보편, 당연하게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선비정신은 너무 희소(稀少)하고, 화랑정신은 편재(偏在)해서 안된다. 우리 한국인에게 보편적으로 당연 하게 있는 정신을 찾아야 한다.

 

 

3). 민족언어(民族言語)는 민족의식(民族意識) 그 자체다

 

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쓰는 한국어 속에서 찾으면 될 것이다. 한국어라도 전문용어나 기술용어는 학자들이 의도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민족의식과 무관하다. 자연스럽게 저절로 생겨난 생활언어를 보아야 한다.

나) 그래서 민족언어는 민족의식 그 자체라고 한다. 많은 생활언어 속에서도 소유격(所有格) 을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면 민족의 가치관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다) 인류의 공통된 가치의식(價値意識)은 욕심(慾心)이고, 욕심은 무한(無限)한 소유욕(所有慾) 과 유한(有限)한 향유욕(享有慾)이 있는데 인류는 무한한 소유욕의 충족을 위해서 인간성· 사회성(人間性·社會性)을 상실하고 범죄하며 전쟁하고 살상하고 있다.

라) 그 소유욕의 결과가 소유이고, 그 소유의 표현이 소유격이기 때문이다. 외국인과 한국인 이 그 소유격을 어떻게 말하는지를 비교해 보면 인류공통의 가치관에 대한 의식(意識)의 차 이를 쉽게 알 수가 있다.

 

 

4). 한국인 정신, ‘우리(仁)’의 증명(證明)

 

가) 한국을 제외한 외국인의 거개가 소유격을 일인격(一人格), 즉 나의 것이라 한다.(나의 집, 나의 아버지·어머니, 내 마누라·남편, 나의 나라)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복수격(複數格), 즉 우리의 것이라 말한다.(우리 집, 우리 아버지·어머니, 우리 마누라·남편, 우리나라)

나) 우리를 한자로 쓰면 인(仁)이라 써야 한다. 인을 ‘어질다’고 해석하는데 어진 것이 무엇인 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仁의 글자를 보면 사람(人)이 둘(二)이라고 썼다. 사람이 둘인 것은 나만도 아니고 너뿐도 아닌 너와 나, 우리, 더불살이(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다. 즉 공 동체의식(共同體意識)이다. 이 仁을 동양의 성인 공자(孔子)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⑴ 우리(仁)는 사람이다.(仁은 人也라: 맞다. 사람은 외톨이로는 살지 못하고 반드시 서로 의 지해야 산다. 사람은 더불어 우리로 사는 존재이다.)

⑵ 우리(仁)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仁은 愛人이니라: 맞다. 미워하면서는 우리로 살지 못 한다. 서로 사랑할 때만 우리로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이다.)

⑶ 이기심을 버리고 예절을 실천해야 남을 사랑하여 우리(仁)가 될 수 있다.(克己復禮면 爲 仁이니라: 맞다. 사욕, 이기심을 앞세우면 남을 사랑할 수 없고 어떤 조직이라도 그 구성 원이 이기심을 앞세우면 그 조직은 와해되고 만다. 우리로 더불어 살려면 이기심을 버려 야 한다.)

⑷ 하루만 이기심을 버리고 예절을 실천하면 천하가 우리로 살 수 있으니 예절을 실 천하려면 예절이 아니면 보지 말며, 듣지 말며, 말하지 말며,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一 日 克己復禮면 天下 歸仁焉이니 非禮勿視하며 非禮勿聽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이니 라: 맞다.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인간생활의 모든 것을 예절이 아니면 하지 않아야 이기심을 버리게 되고 이기심을 버려야 남을 사랑해서 우리로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이 다.)

⑸ 그 예절이 우리나라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예절의 나라이다. 우리가 동방예의지 국이라는 데에 재론(再論)의 여지가 없다면 한국인장신이 우리(仁)라는 것에 대하여서도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게 된다.

⑹ 우리(仁)는 유교·공자사상이고(孟子:夫子之道 仁與不仁), 공자는 창작하지 않고(論語:述而 不作), 공자는 순의 사상을 계승(中庸:仲尼 祖述堯舜)하였으므로 한국인 정신을 가르쳤 다. 그래서 유교사상은 한국인정신이다.

⑺ 하늘(한울)을 거역하면 살지 못한다(明心寶鑑:逆天者 亡). 한울은 ‘하나와 우리’의 준 말 이고 하나와 우리는 바로 우리·仁 사상이기 때문이다.

 

 

 

다. 한국 예절은 우리 고유문화(固有文化)

 

 

1) 생활방식이 같아야 예절이 같다

 

가) 예절을 말하려면 중국의 주자의 가례(朱子의 家禮)를 앞세운다. 우리 예절이 중국의 예절 인가. 그러면 중국과 우리의 생활방식이 같아야 한다.

우리와 중국은 말이 다르다. 그래서 같은 한자를 쓰지만 음이 다르다.

⑵ 우리와 중국은 옷이 다르다, 복장예절이 다를 수밖에 없다.

⑶ 우리와 중국은 음식이 다르다 당연히 음식예절이 다르다.

⑷ 우리와 중국은 주거생활이 다르다. 우리는 온돌, 중국은 평상생활이다.

⑸ 중국은 물을 끓여먹어서 엽차가 대중음료지만 우리는 숭늉을 마신다.

우리와 중국은 생활방식이 다르듯이 예절이 같을 수 없다.

나) 다만 조선시대에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을 펴면서 주자학(朱子學)이 정치사상이 되어 주 자의 사상을 반대할 수 없어서 예절도 주자의 예절을 말했을 뿐이다.

 

 

2) 주자예절의 시작과 우리나라에 들어온 때

 

가) 중국에는 고대(古代)에 삼례(三禮)가 있었다.

⑴ 의례(儀禮): 황제헌훤(黃帝軒轅BC2698 甲子)∼은 주왕(殷 紂王BC1122)

⑵ 주례(周禮): 주 무왕(周 武王BC1121)∼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248)

⑶ 예기(禮記): 진 시황(秦 始皇BC247)∼전한 선제(前漢 宣帝BC50)

위 세 가지의 예서는 시대별로 나뉘어진 것이기 때문에 각각 그 시대의 제왕부터 서민까지 의 모든 예절이 망라되어 있다.

나) 1169년에 중국 남송의 주희(南宋 朱熹1130∼1200)가 그 어머님의 상을 당함에 있어서 위 삼례 중에서 적절한 상례와 제례를 골라 가정의례를 쓰기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말하 는 주자의 가례(家禮)의 시작이다.

다) 그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314년(高麗 忠肅王 1年)에 원(元)에서 14,800권의 서책을 드려와서 만권당(萬卷堂)을 세운 때가 확실하다.

 

 

3) 우리 예절서(禮節書),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가) 고려 인종(仁宗 1123∼1146)이 최윤의(崔允儀 1102∼1162)에게 명하여 상정고금예문(詳定 古今禮文) 50권을 편찬하였고, 이것을 1234년(高宗21年)에 금속활자본(金屬活字本)으로 간행 하였다.

나) 우리 예서의 편찬이 끝난 것은 주자가 가례를 쓰기 시작한 때보다 23년이 앞섰고, 금속활 자본으로 간행한 것이 주자의 가례가 들어오기 80년 전이었다.

다) 이렇게 우리의 예절이 주자의 가례보다 앞섰을 뿐만 아니라 분량에 있어서도 주자의 가 례가 7권인 데에 반해 우리의 상정고금예문은 50권으로 그 7배에 달하는 대작(大作)이었다. 라) 이렇게 우리의 예절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그것이 없어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조선 세종 (世宗 1419∼1450) 때에도 상정고금예문이 있었는데 정치적으로 주자의 가례를 앞세우기 위 해 우리의 것을 버렸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아픈 일이다. (우리의 말보다 영어 를 앞세우면 우리 말도 없어질 것이다. 문화국민은 자기의 것을 아끼는 것이다.)

 

 

4).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것을 지켰다

 

가) 그렇게 주자의 가례를 앞세웠지만 우리는 우리의 문화가 아니면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예절의 대표격인 가정의례를 보면 알 수 있다.

⑴ 어른이 되는 의식인 관례(冠禮)는 중국에서는 900년 전에도 하지 않아서 “관례가 행해지 지 않으니 어른다운 어른이 없다.”고 했는데 우리나라는 고려 광종(965)이 태자의 관례를 하였고, 1895년에 단발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행했다.

⑵ 중국의 혼인례(婚姻禮)는 신랑의 집에서 예식을 올리고 첫날밤을 치러 신랑집에서 부부가 되는데 우리나라는 신부의 집에서 예식을 올리고 첫날밤을 치러 신부의 집에서 부부가 된다.

⑶ 중국의 상례(喪禮)는 묘지를 모시는 시묘(侍墓)제도가 없고 궤연(几筵)을 받드는 예가 없 는데 우리나라는 제도적으로 시묘를 하고 3년간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올리며 궤연을 받 드렀다.

⑷ 중국의 제례(祭禮)에는 엽차(葉茶)를 올리는데 우리나라는 숭늉을 올리고, 중국은 날이 밝 을 때 제사를 지내는데 우리는 첫새벽(丑時1刻)에 지낸다.

나) 이런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조상들이 사대사상(事大思想)에 찌드렀다고 하는 데 우리는 이렇게 우리 것을 지켰다. 그래서 우리의 예절은 우리의 고유문화로 당당하게 우뚝 서있는 것이다.

 

 

 

 

라. 가가례(家家禮)에 대한 바른 이해

 

 

1) 집집마다 지방마다 예절이 다른가?

 

가) 남의 일에 간섭하는 사람을 핀잔 줄 떼 “왜? 남의 제사에 밤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하느 냐?”고 말한다. 이것은 집안마다 지방에 따라서 예절이 다르니 남의집 예절에 간섭하지 말 라는 말이다. 이것을 가가례라고 한다.

나) 만일 가가례가 있다면 학파(學派)에 따라서 예절이 다르든지 아니면 당색(黨色)에 따라 예절이 달라야 할 것이다.

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학파와 당색은 다음과 같다.

 

기 호 학 파(畿湖學派) 구 분 영 남 학 파(嶺南學派)
강원, 황해, 경기, 충청, 전라 지 역 경상
율곡(栗谷) 이 이(李 珥) 학 맥 (北) 퇴게(退溪)이 황(李 滉)
(南) 남명(南冥)조 식(曺 植)
서인(西人)ㅡㅡㅡ>노론(老論)
ㅡㅡㅡ>소론(少論)
당 색 동인(東人) ㅡㅡ>남인(南人)
ㅡㅡ>북인(北人)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대표 예학자 한강 정 구(寒岡 鄭 逑)
① 상례비요 (喪禮備要)
② 가례집람 (家禮輯覽)
③ 의례문해 (疑禮問解)
대 표 예 서 ④ 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

 

① ‘상례비요’는 우리나라 민간예서의 효시본(嚆矢本)이고,

② ‘가례집람’은 우리나라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예학의 이론서이며, ‘가례집람’이 아니었으 면 우리나라의 예학은 창시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정평이 있고, 주희의 가례가 조선의 가 례로 원용·정착 된 저술이라고 일러지고 있다.

引用學說 91개 중 34개가 退溪의 학설이고, 國俗․國制 73건이 소개되고 있다.

그래서 朱熹의 家禮가 우리나라의 가례로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저자인 沙溪 金長生을 그 아들 愼獨齋 金集과 함께 그 父子를 禮學者로서 겨레 의 스승으로 文廟에 從祀해 18賢이 되었다.

③ ‘의례문해’는 가례의 변례(變禮)에 대한 542건의 문답인바 거기에 인용된 134건의 학설 중 59%인 79건이 영남학파의 학설로서 반대학파의 학설을 과감하게 수용함으로서 우리나라 예절의 통일 토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④ ‘오선생예설분류’는 중국 남송(南宋)의 학자(程顥, 程頤, 司馬光, 張載, 朱熹)의 학설로서 중국의 예설이다.

라) 사계의 예서에 보면 우리나라의 풍속[國俗]과 우리나라의 제도[國制]에 대한 언급이 많고, 반대학파의 예설까지도 과감하게 수용하여 예학의 이설(異說)을 최대한으로 조정하여 우리나 라 예설의 보편화에 기여한 노력이 현저하다. 그래서 사계를 조선예학의 종장(朝鮮禮學 宗 長)이라 숭앙(崇仰)하고 있다.

마) 반면에 한강은 중국예절을 중점적으로 연구한 것이 특별히 다른 점이다.

바) 그러므로 우리나라 예절은 학문적으로 크게 다른 점을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가 않다. 사) “밤 놓아라, 대추 놓아라”라는 말로 미루어 제상에 과실을 차리는 것이 가장 심각한 듯이 들리는데 어느 지방, 어느 집엘 가나 과실은 모두 제상의 제일 남쪽 끝줄에 차린다. 그것은 어느 학파, 어느 당에서 썼든 우리나라의 모든 예서에는 과실을 남쪽 줄에 차리도록 그림까 지 그려서 보이고 있다. 다만 밤이나 대추를 어디에 차리라는 말이 없다. 그것은 지방과 계 절에 따라 과실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흡사 모두가 한국어로 말하는데 지방에 따라 약간의 사투리가 있는 것과 같다. 사투리가 있다고 해서 못알아 듣는 것은 아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우리나라에는 가가례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을 호도 하기 위해서 가가례를 핑계 댄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마. 한국의 예학자(禮學者)와 예서(禮書)

 

 

1) 우리나라 예학의 생활화

 

가) 우리나라는 예절이 완전히 일상 생활화하여 학문을 하는 학자라면 의당 예절에 대한 글 을 쓰게 되고, 문답하고, 화제가 되곤 하였다. 때문에 간행된 것뿐 아니라 필사본(筆寫本) 까지도 예서로 전해지는 것이 많다.

나) 그러나 예절을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는 그 모두를 예학자, 예서라고 참고하고 따라 할 수 는 없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예학자로 지목되고, 예서로 분류된 것들을 정통(正統)으로 보는 것이다.(알려진 한학자, 실학자, 정치가, 권세가라고 해서 그들이 예학자일 수는 없을 것이 기 때문이다.)

 

 

2). 한국의 정통(正統) 예학자와 정통 예서

 

禮 學 者 禮 書
구분 성명 생․졸년 연원 학파 당색 책명(권․책수) 찬․간 비고
01 崔允儀 1102-1162 (우리나라 최초 예서 ) ①詳定古今禮文 50卷 1234 金屬活字本
02 權 近 1352-1409 (중국예서 최초 해설서) ②禮記淺見錄26卷11冊 1405











(政府) ③國朝五禮儀8卷 6冊 1474 朝鮮 國家儀禮









(政府) ④經國大典 6典 1485 朝鮮 國家法典
*03 鄭 逑 1543-1620 李滉·曺植門人 嶺南 東人 ⑤五先生禮說分類20卷 1629 宋代學者 禮說
*04 金長生 1548-1631 李 珥 門人 畿湖 西人 ⑥喪禮備要 2卷 2冊 1583 民間禮書嚆矢本


















⑦家禮輯覽 10卷 6冊 1599 朝鮮禮學理論書


















⑧疑禮問解 4冊 1646 變禮 542問答
*05 鄭經世 1563-1633 柳成龍 門人 嶺南 東人 ●禮學 勝於退溪





*06 金 集 1574-1656 金長生의 子 畿湖 西人 ⑨疑禮問解 續 1冊 變禮 151問答
*07 宋浚吉 1606-1672 金長生 門人 畿湖 西人 ●得意 禮學





*08 兪 棨 1607-1664 金長生 門人 畿湖 西人 ⑩家禮源流 14卷 8冊 1711 家禮前後 禮說
*09 李維泰 1607-1684 金長生 門人 畿湖 西人 ●禮學 造詣





*10 朴世采 1632-1695 金 集 門人 畿湖 西人 ⑪南溪禮說 20卷10冊


南溪文集 中
*11 李 縡 1680-1746 金昌協 門人 畿湖 西人 ⑫四禮便覽 8卷 4冊 1844 家禮 實用便宜禮書
12 李宜朝 1727-1805 宋能相 門人 畿湖 西人 ⑬家禮增解 10冊 1792 變禮 解說

 

가) 위 표의 *표 학자는 玄相允의 ‘朝鮮儒學史’와 李丙燾의 ‘韓國儒學史’에 의한 것이다.

나) 우리가 예절을 말함에 있어서는 자기 집의 예절을 앞세우거나, 알려진 학자의 책에서 보 았다거나, 어떤 저명인이 그렇게 한다거나 하는 것을 앞세워서는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예학자로 지목되고 정통예서로 인정받고 있는 학자의 학설과 예서에 의해야 그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래서 정통 예학자와 정통예서에 대하여 필자의 견해보다도 모두의 인정을 받고 있는 역사학자의 저술에 의해서 예시한 것이다.

다) 玄相允의 ‘朝鮮儒學史’와 李丙燾의 ‘韓國儒學史’에 의하지 않고 필자가 지목한 3인의 학자 는 독자의 공감을 위해 그 이유를 간단히 기록한다.

⑴ 01 최윤의(崔允儀): 우리나라 최초의 예서인 ‘詳定古今禮文’ 50권을 저술한 학자이다. ⑵ 02 권근(權近): 비록 중국의 예서이기는 하지만 한자문화권의 3례(三禮)의 하나인 ‘禮記’ 를 우리나라 최초로 해설하여 저술한 학자이다. 그 학문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그 생전에 국가에 의하여 간행되었고 성균관(成均館)의 교재로 쓰였다.

⑶ 12 이의조(李宜朝): 우리나라의 변례(變禮)에 대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모든 학설을 인 용하여 해설한 우리나라 최대(10冊)의 변례 해설서의 저술자이다. 현대도 전통예절의 해석 에는 가장 많이 인용·참고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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